30년 전 군대를 다녀올 때와 지금은 군대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복무기간도 그렇고 병영생활도 많이 달라졌다.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군대내 사망사고 원인이 잘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과 군대를 안 가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세상살이를 해보니 확실히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이들이 사회에 먼저 정착하여 자리를 잘 잡았다는 점이다. 그런 이들이 또 정의를 강조하곤 한다. 이런 게 모순이다. 서민들의 자제만 군대갔다 오거나 보직이 나쁜 곳에서 복무하거나 하는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다. 세상이 그렇고 그렇기 때문이다. So get’es in der welt zu!
한국의 젊은이라면 군 입대를 놓고 고민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창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에 또는 그처럼 잘나가는 나이에 군대를 간다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뭐든지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다.
1992년 여름이었다. 전라도 담양에 가면 추월산 정상에는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보리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지금은 사고가 나서 없어졌지만 짐을 싣는 케이블카가 있었다. 짐만 실어야 하겠지만 사람도 태웠다. 불공을 드리러 가는 어머님과 그 일행을 따라 갔다가 케이블카와 누가 먼저 암자에 도착하는지를 시합을 하였다.
케이블카로는 20분정도 걸리고 일반 사람들의 걸음으로는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주위 사람들은 호기를 부린다고 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먼저 도착하였다. 깜짝 놀라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다시 시합을 하였다. 이번에는 월등하게 이겼다.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거짓말쟁이가 돼 버린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 나이 30살 전후로 해서 체력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북한산을 구기동에서 출발하여 우이동 도선사 쪽으로 내려온 후 성이 안차 다시 도봉산을 올라갔다. 그리고 도봉산도 우이동에서 출발하여 의정부 쪽으로 내려오는데 남들은 8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5시간 반 정도 걸렸다. 그러다보니 악착같이 따라오려고 하는 동료들은 일주일 정도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그렇게 체력이 좋아진 계기는 군대생활이었다. 개성이 보인다는 봉서산을 매일 구보를 하다 보니 자연히 체력이 좋아지게 되었다. 말이 구보지 아침마다 고참들이 군기 잡는 시간이었다. 어차피 올라가면 기합 받을 것인데, 지금 안 맞으려고 고래고래 악을 질러야만 하는 심정이 꼭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와 같았다.
그때는 그런 것들이 적응이 안 되어 고참들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당하다보니 평소 알고 지내던 분에게 “어쩌면 사람들이 그렇게 악랄할 수가 있느냐”라고 편지를 적은 적이 있었다. 답장이 왔는데 그 내용 구절구절 감명 깊은 말이었다. 지금 확실히 기억되는 말이 ‘아름다운 언어로만 뭉쳐있으면 아름다운 시가 아니다’는 구절이다. 이 말을 읽는 순간 한줄기 빛이 비치면서 그 동안의 답답한 마음이 한 순간에 뻥 뚫렸다. 그 후로는 남은 군대생활을 천국처럼 하였다. 진짜 자존심은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고시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될 수 있으면 군대를 가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다. 공부가 끊어지면 다시 공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 역시 군대 입대를 1년만이라도 더 미뤘으면 합격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합격은 늦어졌지만 군대생활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군입대전의 건강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시험 끝난 후 거의 한 달 동안을 하루 평균 15시간 이상을 잠으로만 보냈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남이 봐도 참 측은하게 보이는 모습이었고, 내가 봐도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군대생활을 통해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생은 매우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는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만큼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설령 힘들어도 힘든 것을 모르면 되는 것이고 그러한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면 머릿속의 계산으로는 나오지 않는 결과치가 나오는 것 같다.
내 몸이 힘들고 마음고생이 심한 만큼 내 의식은 그만큼 성장하는 것이고 이것은 어느 누가 뺏어갈 수 없는 귀중한 재산이 된다.
사람이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사는 것이 무척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 불안감은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따라서 실패나 역경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인생을 꼭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 법이 있을까.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다. 오히려 실패와 역경을 통해서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떨쳐버리면 얼마나 인생이 자유로울까. 돈과 인기를 위해서라면 군대를 가서는 안 되겠지만 참된 행복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구도자의 정신이 있다면 어디를 가도 고난과 역경이라는 장애(障碍)를 통하여 배우는 바가 있을 것이다. 돈과 인기는 시간이 지나면 스러지지만 마음속의 행복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필연으로 봐버리고 그 속에서 가치를 찾는 특별한 경우이고 현실은 냉정하게 돌아간다. 어느 신문에 나온 칼럼내용이다.
“모 정치인의 아들은 키 179cm에 몸무게 45kg, 체중미달로 면제를 받은 후 대학원졸업, 박사학위, 연구원 임용 등 순탄한 경로를 거치면서 한국의 주류(主流)사회에 편입되어 살고 있는 반면에, 허원근 일병은 섬지방 출신으로 대학 재학 중 군에 입대하여 전방부대에 배치되어 근무 중 장교-부사관 회식자리에서 중대장이 “라면 맛이 형편없다.”고 핀잔하자 만취한 부사관이 휘두른 총을 맞아 죽었다”(세계일보)
이 땅의 똑같은 20대의 젊은이들이지만 군대를 가느냐, 안 가느냐에 따라 서로 180도 다른 운명을 가지게 된 예이다. 수험생이 군대를 갔다 와서 다시 공부하는데 보통 몇 년이 걸릴까. 복무기간만 공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갔다 와서 새로 적응해야 하는 기간까지 공백기간으로 합쳐야 한다. 요즘같이 경쟁의 속도가 엄청 빠를 때에는 적응기간이 더 걸릴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보면 군대복무기간 2년 반 정도 그리고 적응기간 1년 반 정도, 합해서 4년 넘게 걸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20대의 거의 절반을 공백기간으로 보낸 셈인데, 한창 머리가 잘 돌아가고 뭐를 해도 지치지 않는 의욕이 그 정도의 공백이라면 사그러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구나 다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심정이다. 설령 가더라도 편안한 데로 가고 싶고. 부모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해주고 싶을 것이다. 자식의 인생이 달려있는데 말이다.
애지중지 키운 아들을 군에 보내놓고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군이라는 거대한 성벽에 부딪쳐 죽어버린 아들의 사인규명도 못하는 부모들의 절규와 한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해마다 300명 정도의 젊은 청춘들이 군대에서 죽는데 그 중 100여 명이 자살이라고 한다.
자살의 증거가 없으면 타살로 봐야 함에도 타살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자살이라고 단정하는 상황에서 설령 자살이 맞다하더라도 혈기왕성하고 미래에 대한 꿈이 많은 꽃다운 청춘들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으면 죽음을 선택할까?
군대생활을 할 때 보니까, 제대할 때까지 부모가 면회 한 번 오지 않는 동료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리고 학벌들이라고 해봐야 〈전우신문〉에 나오는 한문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군대 복무기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 황금기인 것 같은 꼴통들도 몇몇 있었다. 순진한 사람이라도 거칠게 생활하다 보면 사람이 변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을 군대물이라고도 하는지 모른다. 이 물이 있으면 사회생활 하기가 힘들어진다. 본인은 힘들게 군대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고생스럽게 한 그만 병신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군대를 갔다 온 어둠의 자식들은 사회의 주류사회에 편입되기가 군대면제자인 신의 아들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다. 몸이 허약한 것을 빌미로 면제받았다면 이해라도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건강한 사람이 면제받아 남들 군대에서 고생하는 기간 동안 착실하게 순탄한 경로를 거쳐 이미 제도권 내에 들어가 자리 잡고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군대에서 나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어둠의 자식들은 서글플 수밖에 없다.
최근 조기유학 붐이나 이민의 열풍이 결코 군대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그들이 권한은 누리고 의무는 내팽개치면서도 지도층인사가 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정의를 구현한다고 한다면 씁쓸할 뿐이다.